경주 옥산서원 ‘만인소’ 유네스코 아태지역목록 등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의 도시로 거듭나

1. 복제개혁반대 만인소(상소본문 부분)경주시는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가 도산서원의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함께 ‘만인의 청원, 만인소’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지역 목록(이하 유네스코 아태기록유산)’에 등재됐다고 밝혔다.

5월 29일부터 31일까지에 대한민국 광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록유산 총회(MOWCAP)’에서 인류가 기억해야 할 중요 기록물로 ‘만인의 청원, 만인소’를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로써 경주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3건(석굴암·불국사, 경주역사유적지구,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과 함께 유네스코 아태기록유산이 추가됨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의 도시로 거듭나게 됐다.

시 관계자는 “이들 만인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문화재청, 경상북도,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과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기록유산과 문화유산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정책을 마련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만인소는 조선시대 만여 명에 달하는 재야 유교 지식인들이 연명해서 왕에게 올린 청원서이다. 만 명이 중요했던 것은 ‘만(萬)이 모든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인소 운동은 1792년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신원해 달라는 청원으로부터 시작됐으며, 이후 각기 다른 사안들을 가지고 19세기 말까지 총 7차례 진행됐다.

이번 아태기록유산에 등재된 만인소는 원본이 남아 있는 1855년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당시 중앙정부에서 진행된 복제 개혁에 반대하는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2점이다.

이 두 종의 만인소는 각각 도산서원과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이번 등재신청을 위해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대여해 보존하고 있다.

만인소는 ‘만여 명의 개인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유교적 윤리관을 국가에 실천적으로 적용하고자 한 민주주의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재야 유교 지식인들이 자발적 참여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국가에 적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청원했던 결과물이라는 점이 등재의 주된 이유가 됐다.

특히 만인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부분은 ‘민주적 절차’에 관한 것이었다. 만인소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통문과 회합을 통해 공론을 모으는 과정을 거친다. 공론에 따라 만인소 운동이 결정되면, 추천과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상소의 대표와 업무 담당자를 선출하고, 여러 상소 초고를 수렴해 논의를 거쳐 공론으로 최종 상소문을 완성한다. 이 상소문에 모든 참여자들은 자필로 이름을 쓰고 수결(sign)을 함으로써 자발적 참여와 자기 책임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번 등재과정에서 만인소는 기록물의 형태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만인소는 청원 내용과 그 청원에 참여한 만여 명의 서명 및 수결로 이뤄진 대형 기록물이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는 10,094명이 연명한 상소로, 폭 1.11m, 길이 96.5m, 무게 16.6kg이다.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8,849명이 연명한 상소로, 폭 1.02m, 길이 100.36m, 무게 8.3kg이다.

이 두 상소의 청원 내용은 다르지만, 유교적 올바름을 실천하려 했던 참여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사도세자 추존만인소’는 정통 왕위 계승자임에도 불구하고 당파 싸움으로 인해 뒤주에 갇혀 불운하게 생을 마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내용이다. 당파적 이해관계로 인해 왕통이 올바르게 서 있지 않은 현실을 바로 잡으려 했던 것이다.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1884년 내려진 복제 개혁에 반대하면서 이 정책에 대한 재고를 청원하는 내용이다. 복제개혁에 대한 반대는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시대에 역행하는 내용일 수 있지만, 유교 이념에서 벗어난 중앙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재야 유교 지식인들은 100m에 달하는 연명 상소를 작성해 왕조의 정통성 논쟁에 참여하고, 유교적 예제를 회복하려는 입장을 중앙에 강력하게 전달했다.

만인소는 그 성격상 중앙정부를 비판하고, 옳은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권력에 반하는 성격들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만인소 운동에 참여한 재야 지식인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실제 만인소 운동을 이끌었던 대표는 유배를 가기도 하고, 중앙정부의 탄압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았다.
참여자의 숫자와 그 성격을 가지고 보면 현대 청와대 청원운동과 닮아 있지만,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만인소 운동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옳지 않음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던 목숨을 건 실천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효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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